나의 발더스 게이트3플레이 여정
나는 원래 게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가끔 친구들과 롤토체스나 칼바람을 하는 정도가 전부였고, 그것마저도 OP.GG같은 족보 없이는 플레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물론 어렸을 때 포켓몬스터 시리즈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내 인생이나 정서에 큰 영향을 준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게임보다는 소설이나 영화, 웹툰 같은 콘텐츠를 더 자주 접했고, 이를 즐기기 위한 나름의 명확한 기준을 세우게 되었다.
- 스토리에 개연성이 있고, 등장한 모든 복선과 떡밥 회수가 철저해야 한다.
- 비주얼과 스토리의 디테일이 살아있어, 세밀하게 관찰할 때만 발견되는 숨겨진 요소를 찾아내는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없고 내 감성과 잘 맞아야 한다.
- 콘텐츠를 즐기는 방식이 독특하고 참신해야 한다.
- 세계관이 논리적이고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취향을 완벽히 충족한 게임이 바로 '발더스 게이트 3(Baldur's Gate 3)'였다.
발더스 게이트 3를 처음 접한 건 우연이었다. 좋아하는 스트리머의 플레이 영상을 보다가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겠다"는 가벼운 호기심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하지만 게임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플레이 시간이 50시간을 넘겼고, 어느새 이 게임은 나의 지적 탐구욕과 깊은 몰입 성향을 만족시키는 콘텐츠가 되었다.
나는 원래 호기심이 강한 성격이라, 특정 주제에 관심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깊이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과학 유튜브 채널에서 본 신소재와 화학 관련 영상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을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영상의 내용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하고 싶었지만,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닌 원자 구조, 화학식, 원소 간의 결합 원리 등을 공부하게 되었고, 결국 양자역학과 대통일장 이론 같은 복잡한 물리적 개념까지 탐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지식 습득을 넘어 철학적인 질문으로까지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중고등학교 시절 문과를 선택했지만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과학이었으며, 탐구 과목도 한국지리와 세계지리처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분야를 선호했다.
이러한 탐구적 성향은 발더스 게이트 3를 플레이할 때도 그대로 드러났다.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수준을 넘어, 게임의 세계관과 철학적 배경까지 깊이 탐구하게 되었다.
발더스 게이트 3는 유서 깊은 TRPG인 '던전 앤 드래곤즈(Dungeons & Dragons)'의 세계관인 '포가튼 렐름(Forgotten Realms)'을 배경으로 한다. 나는 이 사실을 1회차 플레이 이후에야 알았지만, 그 순간부터 게임이 훨씬 더 풍부하게 다가왔다. 게임 내의 지명, 인물, 마법, 기술 등 모든 요소가 단순한 게임적 장치가 아니라, 오랜 역사를 지닌 던전 앤 드래곤즈의 설정과 철학적 배경 위에 구축되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후 던전 앤 드래곤즈의 원서를 구입해 읽기 시작했고, 엘민스터 시리즈와 같은 포가튼 렐름 세계관의 소설까지 찾아 읽었다. 이 과정에서 영어 독해력도 크게 향상되었고, 처음에는 난해했던 설정들이 점점 명확하게 연결되며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는 듯한 즐거움을 느꼈다.
게임 속에서 지나칠 수 있는 작은 NPC들도 저마다의 배경과 서사를 가지고 있었고, NPC의 작은 대사 하나가 포가튼 렐름의 역사와 연결되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작은 성취감을 얻었다. 이렇게 깊이 있게 세계관을 공부하고 난 후 시작한 두 번째 플레이는, 첫 번째 때보다 훨씬 더 깊은 몰입감을 제공했고, 아직 2막 플레이 중반이지만 플레이 시간이 이미 첫 번째 플레이 시간을 넘어섰다. 내 정신은 지금 거의 라이스윈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특히 발더스 게이트 3의 선택 시스템은 작은 결정 하나가 캐릭터의 운명을 완전히 바꿀 만큼 서사의 유연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내 선택 하나하나에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서도 조심스럽고, 작은 일에 깊게 고민하는 내 성격과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한 번의 클릭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긴장하면서도, 내 선택이 게임 세계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주는 만족감이 매우 컸다.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 속 세계관 안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이 경험은, 내가 이전까지 겪었던 그 어떤 콘텐츠와도 차원이 다른 몰입감을 선사했다.
나는 이제 게임을 즐기는 입장에서 나아가, 플레이어가 세계관에 몰입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새로운 지식과 철학적 질문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임을 만들고자 한다. 내가 발더스 게이트 3를 통해 느낀 지적 만족감과 감정적 몰입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하고 싶다. 플레이어들이 게임 속 선택을 통해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가진 의미와 파급 효과를 깊이 고민하게 하고, 자연스럽게 세계관의 철학적 배경과 지식을 탐구하도록 유도하는 그런 게임을 설계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